9000에서 못 산 주식, 6800에서는 왜 못 사나

오늘 코스피가 하루 만에 8.95% 빠졌다. 종가 6,806.93. 사이드카에 이어 서킷브레이커까지 발동됐고, 뉴스는 ‘검은 월요일’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지난달 19일 장중 역대 최고점 9,385.59를 찍었던 지수가 최고점 대비 27% 넘게 내려왔다. 9,000선 첫 돌파에서 7,000선 반납까지 걸린 시간은 딱 17거래일이다.

이런 날 글을 쓰는 이유는 하나다. 나는 이 장면을 전에도 봤다. 두 번. 그리고 그 두 번은 서로 달랐다.

2020년 3월 — 번개, 그리고 뜻밖의 수익

코로나 때 시장은 한 달 만에 무너졌다. S&P500은 2월 19일 고점에서 3월 23일 저점까지 약 34% 빠졌고, 미국 증시에서는 서킷브레이커가 한 달 사이 네 번 걸렸다. 코스피는 1,400선까지 밀렸다. 오늘처럼 거래를 멈춰 세우는 사이렌이 울리던 시절이다.

당시 내 포트폴리오는 주식 비중이 높지 않았다. 절반 이상이 채권이었다. 그래서 그 3월을 남들보다 담담하게 지나갔고, 연준이 코로나 대응으로 금리를 제로까지 내리자 채권에서는 오히려 수익이 났다. 주식이 무너지는 화면 옆에서 계좌는 버티고 있었다. 분산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처음 몸으로 배운 시기였다.

시장의 회복도 폭락만큼 빨랐다. S&P500은 그해 8월에 전고점을 되찾았다. 저점에서 다섯 달이었다. 3월의 공포에 판 사람은 8월의 회복장에 없었다. 번개는 지나가고 나서야 번개인 줄 안다.

2022년 — 장마, 같은 채권이 아픈 자리가 됐다

2022년은 정반대였다. 하루짜리 폭락 대신 1년 내내 흘러내렸다. 연준이 제로금리를 연말 4%대까지 끌어올리는 동안 S&P500은 고점 대비 25%, 나스닥은 한 해에만 33% 빠졌고, 코스피도 한 해 동안 25% 가까이 내렸다.

문제는 내 쪽이었다. 2020년에 나를 지켜준 그 채권 비중을,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이 본격화되기 전에 줄이지 못했다. 주식처럼 요란하게 무너지는 대신 채권은 1년 내내 조용히 흘러내렸고, 나는 그해 상당한 손실을 봤다. 주식 6에 채권 4를 섞은 교과서 포트폴리오조차 두 자릿수 손실을 낸, 수십 년에 한 번 나올 해였다.

그런데 결말은 이번에도 같았다. 손실을 확정하지 않고 시장에 남아 있자, 2023년과 2024년 미국 시장이 2년 연속 20%대 상승으로 돌아왔고 S&P500은 2024년 초 전고점을 되찾았다. 내 계좌의 손실도 그 꾸준한 상승이 메워줬다. 장마는 번개보다 길었지만, 우산을 버리지 않은 쪽이 보상받는다는 결론은 다르지 않았다.

같은 자산이 한 폭락에서는 방패였고, 다음 폭락에서는 상처였다. 이 경험이 내게 남긴 문장은 이것이다. 지난 폭락의 정답은 다음 폭락의 정답이 아니다.

벌금이 아니라 입장료

폭락장마다 다시 생각나는 책이 있다. 모건 하우절의 『돈의 심리학』이다. 그는 시장의 변동성을 벌금이 아니라 입장료로 받아들이라고 쓴다. 벌금은 잘못한 대가라서 피하는 게 맞다. 입장료는 안에 들어가기 위해 내는 돈이라서, 내지 않으면 입장 자체가 없다.

투자의 장기 수익은 공짜였던 적이 없다. 오늘 같은 날이 바로 그 가격표다. 폭락을 벌금으로 여기는 사람은 “내가 뭘 잘못했지”를 찾다가 시장을 떠나고, 입장료로 여기는 사람은 아프지만 낸다. 두 번의 폭락을 지나며 갈린 것은 지능이 아니라 이 관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하기로 정해둔 일

그래서 지금의 나는 예측을 포기하고 룰을 만들었다. 자산별 목표 비중을 정해두고, 리밸런싱은 정기 점검일과 목표 비중 대비 10~15% 괴리, 두 가지 경우에만 움직인다.

이번 급락에서도 할 일은 같다. 오늘 같은 하락이 목표 비중에서의 이탈을 만들면, 그 이탈분만큼이 저가 매수의 예산이다. 지수가 어디까지 더 빠질지 맞히는 게 아니라, 정해둔 비중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를 재는 것이다. 지난 글에서 ‘지금 팔까’라는 질문을 버렸다고 썼는데, ‘지금 살까’라는 질문의 답도 같은 곳에 있다. 방아쇠는 뉴스가 아니라 숫자다.

솔직한 회고 — 9,000의 겁과 6,800의 겁

코스피가 9,000을 넘어가던 지난달에 나는 더 담고 싶었다. 그런데 겁이 나서 담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같은 시장이 27% 할인된 가격표를 붙였는데 이번에도 선뜻 손이 나가지 않는다. 비쌀 때는 더 오를까 봐 못 사고, 쌀 때는 더 빠질까 봐 못 산다. 백화점 세일이면 줄을 설 사람들이 주식 바겐세일에서는 출구로 뛴다. 적어도 나는 가격이 아니라 방향을 사고 있었다. 오르는 중이면 얼마여도 안심이 됐고, 빠지는 중이면 얼마여도 무서웠다.

그렇다고 27% 하락이 곧 ‘싸다’는 뜻은 아니다. 올해 코스피는 고점까지 200% 넘게 오른 뒤였고, 폭락한 오늘 종가도 연초보다는 한참 위에 있다. “결국 회복했다”는 말도 전부 결과론이다. 2020년 3월의 한복판에서 그게 V자인지 L자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고, 다음 폭락이 회복된다는 것도 통계이지 약속이 아니다. 그래서 판정을 지수에 묻지 않는다. 바겐세일에서 담아야 할 것은 ‘많이 빠진 것’이 아니라 ‘내 계획보다 부족해진 것’이다.

버티기의, 그리고 줍기의 전제는 의지가 아니라 구조다. 몇 달치 생활비, 한 자산에 몰지 않은 분산, 당분간 꺼내 쓸 일 없는 돈으로만 하는 투자. 이 구조가 없으면 폭락장은 정신력 게임이 되고, 정신력은 폭락장에서 대체로 진다.

오늘의 한 가지

폭락 한복판에서 새 원칙을 만들지 않는 것. 공포 속에서 만든 룰은 룰이 아니라 반응이다. 오늘 할 일은 이미 있는 룰을 꺼내 읽고, 목표 비중과의 괴리를 재보는 것 하나다. 룰이 아직 없다면,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룰이다. 원칙은 시장이 조용해진 뒤에, 오늘의 기분을 적어둔 메모를 보면서 만들면 된다.

※ 개인 경험을 나눈 글이며, 특정 상품이나 투자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폭락장 #검은월요일 #코스피 #자산배분 #리밸런싱 #돈의심리학 #투자원칙 #장기투자 #투자심리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