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를 열 때마다 제일 초라해 보이는 줄이 있다. 주식도 금도 아닌, 현금성 자산이다. 올해처럼 시장이 크게 오르내린 해에는 더 그렇다. 오른 자산 옆에 있으면 게을러 보이고, 내린 자산 옆에 있으면 그제야 조금 달라 보인다. 나는 이 게을러 보이는 자산을 포트폴리오의 4분의 1 가까이 들고 있다. 오늘은 그 이유를 적어 본다.
같은 책을 다시 꺼낸 이유
『돈의 심리학』은 이 블로그에 한 번 나온 책이다. 폭락장을 되짚던 글에서 “변동성은 입장료지 벌금이 아니다”라는 대목을 빌려 왔다. 그때는 떨어지는 날의 마음을 다루는 대목을 봤고, 오늘 보는 대목은 다르다. 계획이 틀렸을 때를 다루는 대목, 저자가 안전마진이라고 부르는 부분이다.
책의 논지는 단순하다. 미래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니 계획이 맞아야만 굴러가는 구조를 만들면 안 된다. 계획이 틀려도 게임에서 퇴장당하지 않을 여지 — 그 여지가 장기 투자자의 생존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복리는 수익률이 아니라 ‘중단되지 않음’의 게임
책에서 기억에 남는 건 버핏 이야기였다. 버핏의 재산 대부분은 노년에 만들어졌다. 비결이 천재적인 수익률이라기보다, 수십 년 동안 시장에서 퇴장당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라는 해석이다. 복리는 곡선의 끝부분에서 폭발하는데,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만 그 구간을 만난다.
그렇다면 질문이 바뀐다. “어떻게 더 벌까”가 아니라 “무엇이 나를 중간에 퇴장시킬 수 있나”다. 답은 대체로 수익률 표 바깥에 있다. 갑작스러운 목돈 지출, 소득의 공백, 그리고 폭락장에서 겁에 질려 파는 나 자신. 현금 쿠션은 이 셋 모두에 대한 대비다. 최악의 타이밍에 자산을 팔지 않아도 되게 해 주는 장치. 투자 수익으로 보면 0이나 다름없는 자리 — 그게 이 장치의 가격표다.
이 대목에서 오래전에 읽은 책 한 권이 겹쳐졌다. 보도 섀퍼는 『돈』에서 같은 자리를 경제적 에어백이라 부른다. 수익을 바라지 않는 돈으로 몇 달치 생활비를 현금성 자산으로 쌓아 두는 것 — 몇 달치가 필요한지는 스스로 정하라고 했다 — 이것이 경제적 자유로 가는 첫 번째 단계라는 것이다. 부를 불리는 법을 다루는 책이 첫 단계로 수익 없는 돈을 꼽는다. 하우절이 안전마진이라 부르고 섀퍼가 에어백이라 부르는 것의 정체는 같다. 불릴 돈보다 버틸 돈이 먼저인 것이다.
나의 적용
나는 보수적인 투자성향을 가지고 있다. 내가 정한 답은 열두 달치다. 일 년치 생활비를 현금성 자산으로 두는데, 내 포트폴리오의 4분의 1쯤 되는 돈이다. 파킹형 단기금리 상품에 나눠 두고, 목표 비중에서 크게 벗어나면 채우거나 덜어낸다. 용도는 두 가지다. 갑작스럽게 목돈이 나가야 할 때를 위한 비상금, 그리고 시장에 위기가 왔을 때 저가 매수에 쓸 실탄. 들고 있는 것만으로 따라오는 심리적 안정감은 덤이다. 지난 폭락일에 미리 정해 둔 룰대로 리밸런싱 매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이 기준이 있어서였다. 실탄이 없으면 룰은 종이 위의 문장으로 끝난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코로나 때 시장이 폭락했는데, 손에 쥔 현금이 적어 저가 매수를 하지 못했다. 그 경험 이후로 현금성 자산을 일정 수준 아래로 내리지 않는다. 바닥에 깔린 생각은 하나다. 최악의 경우 투자 자산이 전부 증발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최소한의 보험 하나는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눠 두는 곳도 가린다. 마지막 보험이라 부르는 돈이니, 예금자보호가 되는 통장인지 증권사 신용에 기대는 상품인지 정도는 구분해 둔다.
솔직한 회고
반론도 안다. 닉 매기울리는 『Just Keep Buying』에서 현금을 쥐고 때를 기다리기보다 가용한 돈을 바로 투자하는 쪽이 장기적으로 성과가 좋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데이터로 보였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지난 몇 년만 끊어 보면, 쿠션이 얇았다면 내 계좌는 더 불었을 것이다. 그 비용은 실재한다.
그런데 내가 원칙을 지켜낸 순간들을 되짚어 보면, 전부 잔고에 여유가 있을 때였다. 폭락한 날 팔지 않은 것도, 반등을 기다리며 룰대로 산 것도, 쿠션이 있어서 가능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내가 세운 원칙을 지키려면, 마음이 편한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안전마진은 수익의 반대말이 아니라, 수익을 끝까지 가져가기 위한 조건이다. 열두 달치는 내 손실 감내 폭에 맞춘 두께이지, 모두에게 정답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늘의 한 가지
계좌를 열고 현금성 잔고를 월 생활비로 나눠 보자. 그 몫이 지금 내 에어백의 두께다. 계획이 틀어졌을 때 몇 달을 버틸 수 있는 구조인지 — 수익률보다 먼저 볼 숫자는 그것이었다.
이 글은 개인의 투자 기록이자 독서 감상이며, 특정 상품의 매수·매도 추천이 아닙니다. 투자 판단과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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