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내게 남긴 것은 환율 전망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오건영의 『환율의 대전환』을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건 환율 전망이 아니었다. 내 자산을 다시 세어 보게 만든 한 줄의 자각이었다. 월급도 원화, 아파트도 원화, 연금 계좌도 대부분 원화 — 나는 분산투자를 한다고 믿어 왔지만, 통화라는 눈으로 보면 이미 원화라는 한 자산에 전 재산을 베팅한 상태였다.
요즘 환율이 1,470~1,480원대를 오간다. 얼마 전까지 1,500원대 유지하던 환율이 조금이나마 내려간 것이다. 이런 시기마다 “달러 투자, 지금 시작해도 되나”라는 질문이 쏟아진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서 내 질문은 달라졌다. 지금 사도 되느냐가 아니라, 애초에 나는 왜 달러를 하나도 안 들고 있었던걸까.
원화만 든 사람에게 위기는 두 번 온다
한국 경제는 수출 중심이다. 글로벌 경기가 꺾이면 수출이 꺾이고, 외국인 자금이 빠지면서 원화 가치가 같이 내려간다. 국제 결제에서 원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0.1% 남짓 — 위기가 오면 먼저 팔리는 통화라는 뜻이다. 그래서 원화 자산만 든 사람에게 위기는 두 번 온다. 주식이 떨어져서 한 번, 그 돈의 통화 가치가 떨어져서 또 한 번.
달러는 정확히 반대로 움직였다. 2020년 코로나 때도, 2022년 금리 인상기에도. 상당 부분의 경우 내 원화 자산이 파랗게 질릴 때마다 환율은 올랐다. 시장에서는 이런 성질을 ‘달러 스마일’이라 부른다. 미국 경제가 압도적으로 좋을 때도, 전 세계가 위기일 때도 달러는 강해진다는 것인데, 책이 보여주는 달러의 얼굴이 정확히 이것이었다. 한국 투자자에게 이 성질은 이론이 아니라 방어 수단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내리는 날, 혼자 오르는 자산이 하나 있다는 뜻이니까. (다만 올해 6월 장중 1,560원선까지 치솟았을 때는 상반기 내내 코스피와 환율이 동반 상승하는 국면이었는데 이는 특별히 위기 상황은 아니었으므로 논외로 하겠다)
달러는 수익 자산이 아니라 실탄이다
나는 달러에서 수익을 기대하지 않는다. 달러의 진짜 쓸모는 위기 때 드러난다. 리밸런싱 규칙을 이야기하면서 목표 비중에서 벗어난 자산을 되돌린다고 썼는데, 폭락장에서 그 ‘되돌리기’를 실제로 하려면 쏠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한다. 최근 몇 년간 위기가 올 때마다 나는 들고 있던 달러 덕분에 하락한 자산을 규칙대로 살 수 있었다.
2020년 3월이 지금도 아쉬운 이유가 그것이다. 그때 나는 달러를 충분히 들고 있지 않았다. 저점이 눈앞에 있는데 실탄이 없었다. 위험이 만들어지는 시점에 대해 쓰면서 위험은 편안할 때 쌓인다고 했는데, 기회도 마찬가지였다 — 기회를 잡을 준비는 위기가 오기 전에, 편안할 때 해 두는 것이었다.
타이밍은 버리고 적립식으로
달러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해도 다음 질문이 발목을 잡는다. 지금은 너무 비싼 것 아닌가. 지난 10년만 봐도 환율은 1,100원 아래에서 1,500원 위까지 오갔다. 이 등락의 저점만 골라 사는 일은 내 능력 밖이다.
그래서 나는 주식과 똑같이 했다. 매달 일정 금액의 달러를 적립식으로 산다. 환율이 높으면 적게 사지고 낮으면 많이 사진다. 환율이 높은 지금이 사기 좋은 시점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적립식이니까 그 판단을 할 필요가 없다. 자산배분에서 비율을 정하고 나서 종목 고민이 사라졌던 것과 같은 구조다 — 타이밍이라는 질문 자체를 규칙이 흡수한다.
달러를 담는 다섯 가지 방법
방법마다 세금과 쓰임이 다르다.
외화예금 — 은행에서 달러를 사서 넣어 두는 기본형. 이자에 15.4% 이자소득세가 붙지만 환차익은 비과세다. 환전 스프레드가 비용이다.
달러 RP — 증권사에서 달러로 사는 환매조건부채권. 하루 단위로 이자가 붙고 환매가 빠르다. 환차익 비과세는 동일하고, 외화예금보다 금리가 나은 경우가 많다. 해외 주식 계좌의 유휴 달러를 놀리지 않는 용도로 알맞다.
달러 ETF — 환전 없이 원화로 사는 달러 노출. 매매차익에 15.4% 배당소득세가 붙는 대신 소액·간편이 장점이다. 매매차익은 배당소득이라 연 2,000만 원을 넘으면 금융소득종합과세에 합산된다는 점은 나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달러 MMF — 이미 달러를 들고 있는 사람이 단기로 굴리는 펀드. 환전이 필요하고 최소 금액이 있는 경우가 많다.
외화증권계좌 — 미국 주식·ETF를 사려면 어차피 달러가 필요하다. 투자 대기 자금을 그냥 두지 않고 굴리는 게 요령이다.
이 중 내가 실제로 쓰는 건 두 가지다. 연금 계좌들(DC·IRP·연금저축)과 ISA에는 ACE 미국달러SOFR금리(합성) ETF를 담아 둔다. 총보수가 낮고 SOFR 금리가 복리로 쌓여서 달러 예금 대신으로 쓰고 있다. 세금을 계좌가 대신 관리해 주는 것도 이 방식의 장점이다. 다만 환노출형이라 퇴직연금에서는 위험자산으로 분류돼, DC·IRP에서는 적립금의 70%까지만 담을 수 있다. 해외 주식 계좌에서는 대기 자금을 BIL 같은 미국 초단기 국채 ETF에 파킹해 둔다. 어느 쪽이든 원칙은 하나다 — 실탄도 놀려 두지 않는다.
얼마나 담을 것인가
정답은 없지만 나는 전체 포트폴리오의 10~20%를 달러 자산으로 유지하는 것이 내 기준에 맞다고 봤다. 더 중요한 건 숫자보다 역할의 구분이다. 달러는 오를 걸 기대하고 사는 자산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이 내릴 때 쓰라고 준비해 두는 자산이다. 물론 다음 위기에도 이 패턴이 반드시 반복된다는 보장은 없다. 나는 보장이 아니라 준비를 사는 것이다. 그래서 수익률 표에서 달러 자리가 초라해 보여도 팔지 않는다. 실탄은 평시에 초라해 보이는 게 정상이다.
예전의 나 같은 분께 권하고 싶은 건 거창한 환테크가 아니다. 이번 달부터 커피 몇 잔 값이라도 달러를 정기적으로 사 보는 것. 금액이 아니라 구조를 만드는 일이 먼저다. 월급도 집도 연금도 원화인 사람에게, 그 작은 달러가 언젠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돈이 될 수 있다.
※ 개인 경험을 나눈 글이며, 특정 상품이나 투자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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